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출석하고 있는 교회 소그룹 모임중에,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각자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저마다 한참을 고민 고민하며 생각하다가 자기 순서를 기다려 발표를 하는데, 대부분은 연애시절, 결혼하던 날, 자녀 출산하던 날, 회사에서 승진하던 날 등의 의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물론 주님을 영접하던 날이라고 대답하신 분이 가장 많은 박수를 받으셨지만... 나는 살아오면서 언제 가장 행복하였을까? 영사기를 뒤로 돌리며 ‘흑백영화’같은 추억에 잠겨보았다.
북악산 자락 아래 아담하고 예쁜 ‘꾀꼬리 동산’으로 유명한 K고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운강문학반’이라는 교내 동아리에 가입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름이 좀 촌스러운 듯도 하지만 ‘구름이 강을 이루어 흘러가듯이 우리의 시혼(詩魂)을 만들자’며 쉬는 시간 교실에 들어와 폼을 잡고 가입을 권유하던 선배의 검은 뿔테 안경이 왠지 그때는 그렇게 멋있어 보였었다. 다른 친구들은 인수분해와 싸우느라고 한참 바쁜 와중에도 우리는 학교 신문과 교지를 제작한다는 특권(?)아닌 특권으로 수업을 빼먹고는 4층 건물 구석에 마련되어 있던 문학반실에서 교정지를 놓고 시간을 죽이거나, 아니면 선배를 따라 취재를 간답시고, 구상유취의 고등학교 1학년 짜리가 당대 문필가들을 겁도 없이 방문하기도 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당시 문예지 ‘문학사상’을 이끌어 가던 이어령 주간과의 대담 취재를 나갔는데, 이 주간의 ‘cosmopolitanism'이라는 용어를 잘못 알아듣고 ’cosmopolitism'으로 교지에 기사를 썼다가 나중에 선배들에게 빳다를 맞았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서울 시내 세칭 명문 남녀 고등학교 문학부원끼리, 서로의 작품을 읽고 평하는 ‘서우회’라는 연합 써클이 있었다. 선배들에 이끌려 나간 정동교회 부속 건물인 젠센 기념관에는 겁나게(?) 똑똑해 보이는 미래 文士들이 모여있었다. 아, 그때 그 시절 나는 왜 그렇게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얼굴은 또 왜 그렇게 금세 홍조를 띠고는 했을까? 고2, 고3 선배들이 마치 하늘처럼 여겨지고, 내가 쓴 작품들은 정말 낙서처럼 생각되고는 했다. 그리고 특히나 마음속으로 좋아했던 그 모임의 한 여학생 앞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고등학교 1학년이 다 끝나가는 12월 어느날, 우리는 미당 서정주 선생님을 초대 강평선생님으로 모시고 ‘문학의 밤’을 개최하였다. 두 달을 끙끙거리며 ‘호루라기’라는 시를 써서 순서지와 작품집에 올리기는 했지만, 다른 학생들 작품과 비교할 때 너무도 부끄럽고 마냥 숨고만 싶었다. 간신히 내 차례의 낭독이 끝나고 - 그때는 또 왜 그렇게 실내조명을 어둡게 하고는, 꼭 비발디의 ‘사계’만을 배경음악으로 틀었는지... - 마지막으로 미당 선생님의 강평시간이었다.
“오늘 작품 중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1학년 민완기군의 ‘호루라기’를 칭찬해주고 싶군요.”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물 속에 자신을 잘 담아, 형상화하려는 노력이 돋보였습니다.”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미당 선생이 누군가? 교과서로나 뵈었던 천하에 미당 선생이 지금 날 보고...
그날 그 추운 겨울날, 젠센기념관 강당에서 집에까지 버스도 안타고 걸어 돌아가는 길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내 삶에 첫 번째 정상(頂上)경험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강평시간이 끝나고 나서 나를 보고 활짝 웃어준 그 아이의 미소 덕분에 내게는 그 순간이 너무도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아있다.
그 때 떨리는 심정으로 그 아이를 생각하며 썼던 그 시를 오늘 다시 한번 기억해본다.
문득 / 노래가 되고 싶다
가끔씩 / 잃어버린 曲調를 달고
그냥 그대로의 얼굴을 / 돌아다 보고싶다
우뚝 / 우뚝 / 서고마는 / 강한 숨결이지만
나는 슬픈 요들일 뿐 / 돌아다 볼 뿐
자꾸만 / 더운 호흡으로 이어지는
피리소리이고 싶다
돌아선 눈 속에 / 가 안기는
짤막한 이야기이고 싶다.
북악산 자락 아래 아담하고 예쁜 ‘꾀꼬리 동산’으로 유명한 K고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운강문학반’이라는 교내 동아리에 가입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름이 좀 촌스러운 듯도 하지만 ‘구름이 강을 이루어 흘러가듯이 우리의 시혼(詩魂)을 만들자’며 쉬는 시간 교실에 들어와 폼을 잡고 가입을 권유하던 선배의 검은 뿔테 안경이 왠지 그때는 그렇게 멋있어 보였었다. 다른 친구들은 인수분해와 싸우느라고 한참 바쁜 와중에도 우리는 학교 신문과 교지를 제작한다는 특권(?)아닌 특권으로 수업을 빼먹고는 4층 건물 구석에 마련되어 있던 문학반실에서 교정지를 놓고 시간을 죽이거나, 아니면 선배를 따라 취재를 간답시고, 구상유취의 고등학교 1학년 짜리가 당대 문필가들을 겁도 없이 방문하기도 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당시 문예지 ‘문학사상’을 이끌어 가던 이어령 주간과의 대담 취재를 나갔는데, 이 주간의 ‘cosmopolitanism'이라는 용어를 잘못 알아듣고 ’cosmopolitism'으로 교지에 기사를 썼다가 나중에 선배들에게 빳다를 맞았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서울 시내 세칭 명문 남녀 고등학교 문학부원끼리, 서로의 작품을 읽고 평하는 ‘서우회’라는 연합 써클이 있었다. 선배들에 이끌려 나간 정동교회 부속 건물인 젠센 기념관에는 겁나게(?) 똑똑해 보이는 미래 文士들이 모여있었다. 아, 그때 그 시절 나는 왜 그렇게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얼굴은 또 왜 그렇게 금세 홍조를 띠고는 했을까? 고2, 고3 선배들이 마치 하늘처럼 여겨지고, 내가 쓴 작품들은 정말 낙서처럼 생각되고는 했다. 그리고 특히나 마음속으로 좋아했던 그 모임의 한 여학생 앞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고등학교 1학년이 다 끝나가는 12월 어느날, 우리는 미당 서정주 선생님을 초대 강평선생님으로 모시고 ‘문학의 밤’을 개최하였다. 두 달을 끙끙거리며 ‘호루라기’라는 시를 써서 순서지와 작품집에 올리기는 했지만, 다른 학생들 작품과 비교할 때 너무도 부끄럽고 마냥 숨고만 싶었다. 간신히 내 차례의 낭독이 끝나고 - 그때는 또 왜 그렇게 실내조명을 어둡게 하고는, 꼭 비발디의 ‘사계’만을 배경음악으로 틀었는지... - 마지막으로 미당 선생님의 강평시간이었다.
“오늘 작품 중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1학년 민완기군의 ‘호루라기’를 칭찬해주고 싶군요.”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물 속에 자신을 잘 담아, 형상화하려는 노력이 돋보였습니다.”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미당 선생이 누군가? 교과서로나 뵈었던 천하에 미당 선생이 지금 날 보고...
그날 그 추운 겨울날, 젠센기념관 강당에서 집에까지 버스도 안타고 걸어 돌아가는 길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내 삶에 첫 번째 정상(頂上)경험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강평시간이 끝나고 나서 나를 보고 활짝 웃어준 그 아이의 미소 덕분에 내게는 그 순간이 너무도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아있다.
그 때 떨리는 심정으로 그 아이를 생각하며 썼던 그 시를 오늘 다시 한번 기억해본다.
문득 / 노래가 되고 싶다
가끔씩 / 잃어버린 曲調를 달고
그냥 그대로의 얼굴을 / 돌아다 보고싶다
우뚝 / 우뚝 / 서고마는 / 강한 숨결이지만
나는 슬픈 요들일 뿐 / 돌아다 볼 뿐
자꾸만 / 더운 호흡으로 이어지는
피리소리이고 싶다
돌아선 눈 속에 / 가 안기는
짤막한 이야기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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