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인간은 누구나 자연의 상태를 동경한다. ‘자연스럽다’라는 표현은 어느 한 분야의 가장 정점(頂點)에 있는 ‘기’(技)와 ‘예’(藝)에 주어지는 최상의 찬사라고 받아들여도 큰 무리는 없을 듯싶다. 그만큼 우리는 인위적이고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어색함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물 흐르는 듯한 편안함을 더 선호하는 성향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실제를 들여다보면 너무나 많은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은 법(法)이라는 개념이 그러하다. 원래 法이라는 글자는 물 수에 갈 거자가 합쳐진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즉 물이 흐르는 것처럼 우리들을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원래 법의 근본 취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고유의 취지가 무색하게도 오늘날 법은 우리를 부자연스럽고 자유함에서 구속하는 불편한 사회적 장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법’이라는 글자를 물 수에 그칠 지 자를 합하여 ‘沚’로 바꾸어 써야 하지는 않을까?
한여름 텃밭에 나가 채소를 돌보느라면, 며칠만 마음을 놓고 있어도 어느 틈인가 잡초들이 무성하게 번져나가고 만다. 쪼그리고 앉아 땅바닥을 오리걸음으로 기어다니면서 잡초들을 뽑고 있노라면 나중에는 다리도 뻣뻣해지고 무엇보다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중간에 잠시 일어나면 똑바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직립하기조차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또한 흙 장갑을 끼고도 손톱 밑을 파고드는 흙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렇게 기고, 뜯고, 뽑으면서 도달한 결론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인 모든 생명의 씨앗을 다 살려내려는 대지(大地)의 본성과 자신이 뿌리고 가꾼 생명만을 보존해내려는 인간의 본성 사이의 대결’로 귀결된다.
‘시간’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더욱 더 그러하다. 태초 이래로 단 1초도 멈춘 적이 없이 시간은 우리 곁을 냉정하게 흘러가고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매일 86,400원이 입금되는 저금통장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그 돈을 아껴두고 잔액을 남겨두어도 자정 마감 시간이 되면 몽땅 인출되어 사라지고 마는 허무한 통장이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가는 시간을 붙잡아 두기 위해 有史이래 우리 인류는 얼마나 애를 써 왔던가? 불로초를 구하고, 땅 밑에다 지상과 똑같은 궁전을 건설하고, 애꿎은 사슴과 물개를 죽이고, 보톡스 주사로 주름을 펴고 마침내는 신비의 파란색 명약을 통해 가히 入神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만 셈이 아닌가...
어떤 항아리든지 물이 가득 차면 반드시 흘러넘치게 되어있다. 모든 그릇은 꼭 필요한 만큼의 분량을 담아 남김도 모자람도 없이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라는 그릇은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채워도 채워도 흘러넘치는 법이 없다. 수위(水位)를 넘기면 범람하여 주위를 옥토로 만드는 것이 강둑의 본성이라면, 온갖 냄새로 가득 찬 쓰레기가 꽉 들어차도 트림 한 번 안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결국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이 자연의 본성을 함축한다면, 낮은 곳에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머리 두려는 욕망이 인간의 본성을 대변한다 할 것이다. 있는 자리에서 바벨탑을 쌓아가는 인간의 '치기(稚氣)‘는 어쩌면 영원히 우리가 안고 가야할 짐인지도 모른다.
자연의 일부이면서, 자연의 상태를 간절히 동경하면서도 끝끝내 자연의 본성과는 역행하려는 이 인간 존재의 웃지 못 할 본성은 영원한 숙명일까...
우선은 법(法)이라는 개념이 그러하다. 원래 法이라는 글자는 물 수에 갈 거자가 합쳐진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즉 물이 흐르는 것처럼 우리들을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원래 법의 근본 취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고유의 취지가 무색하게도 오늘날 법은 우리를 부자연스럽고 자유함에서 구속하는 불편한 사회적 장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법’이라는 글자를 물 수에 그칠 지 자를 합하여 ‘沚’로 바꾸어 써야 하지는 않을까?
한여름 텃밭에 나가 채소를 돌보느라면, 며칠만 마음을 놓고 있어도 어느 틈인가 잡초들이 무성하게 번져나가고 만다. 쪼그리고 앉아 땅바닥을 오리걸음으로 기어다니면서 잡초들을 뽑고 있노라면 나중에는 다리도 뻣뻣해지고 무엇보다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중간에 잠시 일어나면 똑바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직립하기조차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또한 흙 장갑을 끼고도 손톱 밑을 파고드는 흙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렇게 기고, 뜯고, 뽑으면서 도달한 결론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인 모든 생명의 씨앗을 다 살려내려는 대지(大地)의 본성과 자신이 뿌리고 가꾼 생명만을 보존해내려는 인간의 본성 사이의 대결’로 귀결된다.
‘시간’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더욱 더 그러하다. 태초 이래로 단 1초도 멈춘 적이 없이 시간은 우리 곁을 냉정하게 흘러가고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매일 86,400원이 입금되는 저금통장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그 돈을 아껴두고 잔액을 남겨두어도 자정 마감 시간이 되면 몽땅 인출되어 사라지고 마는 허무한 통장이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가는 시간을 붙잡아 두기 위해 有史이래 우리 인류는 얼마나 애를 써 왔던가? 불로초를 구하고, 땅 밑에다 지상과 똑같은 궁전을 건설하고, 애꿎은 사슴과 물개를 죽이고, 보톡스 주사로 주름을 펴고 마침내는 신비의 파란색 명약을 통해 가히 入神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만 셈이 아닌가...
어떤 항아리든지 물이 가득 차면 반드시 흘러넘치게 되어있다. 모든 그릇은 꼭 필요한 만큼의 분량을 담아 남김도 모자람도 없이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라는 그릇은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채워도 채워도 흘러넘치는 법이 없다. 수위(水位)를 넘기면 범람하여 주위를 옥토로 만드는 것이 강둑의 본성이라면, 온갖 냄새로 가득 찬 쓰레기가 꽉 들어차도 트림 한 번 안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결국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이 자연의 본성을 함축한다면, 낮은 곳에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머리 두려는 욕망이 인간의 본성을 대변한다 할 것이다. 있는 자리에서 바벨탑을 쌓아가는 인간의 '치기(稚氣)‘는 어쩌면 영원히 우리가 안고 가야할 짐인지도 모른다.
자연의 일부이면서, 자연의 상태를 간절히 동경하면서도 끝끝내 자연의 본성과는 역행하려는 이 인간 존재의 웃지 못 할 본성은 영원한 숙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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