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내가 카나다에 온지 벌서 25년, 처음 정착한 곳이 써리였는 데 외국치고는 좀 시골 분위기가 있었다. 뿐만아니라 교통이 매우 불편한 곳이다. 시내로 나가려면 좁은 패툴로 브릿지를 이용해서 가는 길과 No.1고속 도로를 이용해야한다. 더우기 나는 유학생으로 밴쿠버 서쪽 끝에 있는 Regent college를 다니는 데 너무 힘들어 부득이 이사까지 하였다. 그 후 내가 다시 써리에 정착한지 20년, 처음에 낯설고 외국같던 이곳은 이제 우리 동네로서 사는데는 시내로 갈 때 빼고 별로 불편함이 없다. 대형 몰이 두 곳 , 수영장도 여러 곳이며 도서실과 컴뮤니티 센터 등등에 가는 데 10분 이내로 갈 수 있어 매우 편리하다. 그리고 남쪽72번가 양지바른 언덕에는 나와 아내가 언젠가 묻혀야 할 곳이 준비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는 외국이란 개념이 거이 없고 사는 데 편리한 우리 동네란 생각이 앞선다.
허나 시내로 가려면 언제나 거쳐야 할 곳이 바로 패툴로 브릿지이다. 지금도 이 다리를 건너노라면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오래된 사건이지만 내가 차를 새로 구입한 지 두주일 만에 그곳에서 대형 사고를 당하였다. 나는 딸애와 함께 그곳을 운전 중 차량 여러대가 갑짜기 내 차선으로 뛰어들어 네 대의 차량이 함께 부딪치고 말았다. 그 때 다리 위에 경찰차량이 네 다섯대. 소방차량이 세대 등등 달려와서 사고 차량들을 수습하였고 내차를 옆으로 들이받은 차는 소방관들이 장비들을 이용하여 승객을 꺼내었다.
문제는 그 후 ICBC의 편지로 부터 시작 되었다. 그 편지에 의하면 내가 사건의 책임이 100%라는 것이다. 그 때 나는 너무 억울하여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백방으로 사건을 수습하려 뛰어 다녔다. 특히 신문에 실린 유명한 서양 변호사 세분 모두에게 상담을 하였지만 그들 모두 한결같이 ICBC상대로 싸워 이길 수 없다 하였다. 그래도 나는 너무 억울하여 홀로 ICBC를 상대로 동의 할 수 없다고 어필하였다. 분명히 내 잘못이 아니라 하였지만 그 당시 근처의 증인들 모두 나의 잘못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말에 끝까지 승복할 수 없다고 하여 결국 세 명의 ICBC사고 전문가들과 패널을 하기로 하였다. 그 때 나는 내 편 증인으로 최수진씨를 지명하여 함께 패널에 참석하였다.
드디어 세명의 전문가들과 나와 최수진씨 그리고 나의 담당자가 함께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이 갖고온 사진들을 보니 아주 결정적인 사진 즉 옆에서 내차를 받아 문짝이 찌그러져 소방관들이 기계로 문을 짜르는 사진이 증발된 것을 내가 발견하였다. 나는 그 때 그들에게 증발된 사진을 갖고 오라 하였다. 그러자 한명이 갖고온 결정적인 사진을 갖고 왔다. 나는 그 사진을 가르키며 왜 옆차가 문이 안 열릴 정도로 되었는 지를 나에게 설명해 주면 너희들의 결정에 승복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세명의 전문가들이 나에게 잠깐 밖에 나가 있으라 하더니 잠시 후 나를 불렀다. 그리고 “O.K.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우리들이 결정하였다.” 그 때 나는 오랜 스트래스끝에서 해방되어 너무 기뻣다.
그 때 내가 느낀 점은 분명히 내 잘못이 없다면 끝까지 어필하여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내 경우는 증인들이 모두 백인이고 세명의 운전자들 모두 같은 백인들이여서 내가 힘든 싸움을 하게 된 경우였다. 그리고 아주 아쉬웠던 일은 만나는 변호사들마다 “ICBC를 상대로 이길 수 없어 미안하다” 라고 한 일이다. 글세 억울한 사건을 맡아 도와주는 일이 변호사 일이라 생각하는 데 현실은 전혀 다른 것 같다.
나는 지금도 패툴로 브릿지위를 달릴 때면 오래전의 사건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너무 억울해서 여기 저기 따라다녔던 일들, 그리고 ICBC를 상대로 홀로 어필 했던 일들, 결국 패널에서 180도 뒤집은 그 판결 생각만해도 저절로 흐믓한 마음에 멀리 보이는 흰눈 덮흰 산들이 더욱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허나 시내로 가려면 언제나 거쳐야 할 곳이 바로 패툴로 브릿지이다. 지금도 이 다리를 건너노라면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오래된 사건이지만 내가 차를 새로 구입한 지 두주일 만에 그곳에서 대형 사고를 당하였다. 나는 딸애와 함께 그곳을 운전 중 차량 여러대가 갑짜기 내 차선으로 뛰어들어 네 대의 차량이 함께 부딪치고 말았다. 그 때 다리 위에 경찰차량이 네 다섯대. 소방차량이 세대 등등 달려와서 사고 차량들을 수습하였고 내차를 옆으로 들이받은 차는 소방관들이 장비들을 이용하여 승객을 꺼내었다.
문제는 그 후 ICBC의 편지로 부터 시작 되었다. 그 편지에 의하면 내가 사건의 책임이 100%라는 것이다. 그 때 나는 너무 억울하여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백방으로 사건을 수습하려 뛰어 다녔다. 특히 신문에 실린 유명한 서양 변호사 세분 모두에게 상담을 하였지만 그들 모두 한결같이 ICBC상대로 싸워 이길 수 없다 하였다. 그래도 나는 너무 억울하여 홀로 ICBC를 상대로 동의 할 수 없다고 어필하였다. 분명히 내 잘못이 아니라 하였지만 그 당시 근처의 증인들 모두 나의 잘못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말에 끝까지 승복할 수 없다고 하여 결국 세 명의 ICBC사고 전문가들과 패널을 하기로 하였다. 그 때 나는 내 편 증인으로 최수진씨를 지명하여 함께 패널에 참석하였다.
드디어 세명의 전문가들과 나와 최수진씨 그리고 나의 담당자가 함께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이 갖고온 사진들을 보니 아주 결정적인 사진 즉 옆에서 내차를 받아 문짝이 찌그러져 소방관들이 기계로 문을 짜르는 사진이 증발된 것을 내가 발견하였다. 나는 그 때 그들에게 증발된 사진을 갖고 오라 하였다. 그러자 한명이 갖고온 결정적인 사진을 갖고 왔다. 나는 그 사진을 가르키며 왜 옆차가 문이 안 열릴 정도로 되었는 지를 나에게 설명해 주면 너희들의 결정에 승복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세명의 전문가들이 나에게 잠깐 밖에 나가 있으라 하더니 잠시 후 나를 불렀다. 그리고 “O.K.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우리들이 결정하였다.” 그 때 나는 오랜 스트래스끝에서 해방되어 너무 기뻣다.
그 때 내가 느낀 점은 분명히 내 잘못이 없다면 끝까지 어필하여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내 경우는 증인들이 모두 백인이고 세명의 운전자들 모두 같은 백인들이여서 내가 힘든 싸움을 하게 된 경우였다. 그리고 아주 아쉬웠던 일은 만나는 변호사들마다 “ICBC를 상대로 이길 수 없어 미안하다” 라고 한 일이다. 글세 억울한 사건을 맡아 도와주는 일이 변호사 일이라 생각하는 데 현실은 전혀 다른 것 같다.
나는 지금도 패툴로 브릿지위를 달릴 때면 오래전의 사건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너무 억울해서 여기 저기 따라다녔던 일들, 그리고 ICBC를 상대로 홀로 어필 했던 일들, 결국 패널에서 180도 뒤집은 그 판결 생각만해도 저절로 흐믓한 마음에 멀리 보이는 흰눈 덮흰 산들이 더욱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김유훈의 다른 기사
(더보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