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기억을 남겨주는 사람일까?

섬별 줄리아헤븐 김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6-04-16 16:18

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지난 한 해는 내게 그동안 뚜렷한 기억 하나 남겨놓지 않고 무심히 질주하던 여뉘 해와 달리, 달마다 소소한 시간의 기억 속에 기쁨과 슬픔, 고마움과 미안함, 즐거움과 아쉬움 그리고, 그리움이 배인 진한 여운을 많은 이야기 안에 담아 넣고 총총히 옮겨 간 해였다.

영화 속에나 보았던 아름답고 환상적인 드레스와 멋진 턱시도를 갖춰 입은 아들 녀석의 로맨틱한 고등학교 졸업식을 비롯하여 많고 많은 일이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그중 내게 두 번의 좌절과 두 번의 희망의 메시지를 받았던 일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구르는 낙엽조차도 곱디고운 빛깔을 지니고 있었을 밴쿠버의 지난가을과, 그다지 높지 않은 하얀 설원의 매혹적인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도심을 둘러싸고 있어, 멋지고 낭만적이었을 것 같은 밴쿠버의 겨울에 난, 이별의 연습도 이별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소중한 친구 둘의 이별을 맞았다.

근 이십여 년 동안, 여러 차례의 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겪어내면서도 긍정적인 사고와 특유의 밝은 웃음소리를 잃지 않고 멀리 낯선 곳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나를 먼저 생각하고 안쓰러워하던 내 사십여 년 지기 여고 동창은 길고 긴 아픔과 고통을 내려놓고, 단풍이 한창 어여쁘던 가을에 떠났다. 유달리 서로 많이 아끼고 우정을 나눴던 친구와의 수많은 시간의 기억을 토해내며 슬픔에서 겨우 회복될 무렵 빅토리아에서 또다시 정말 믿기 힘든 비보가 날아들었다.

캐나다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은은하게 다가왔던 내 가족 같은 친구. 내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도 내 곁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며 좌절하지 않도록 나와 함께 기도하던 고마운 내 친구. 낯선 문화와 어눌한 언어에서 오는 불편함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첫 벽 안의 친구이자 만 구 년을 함께 한 단짝 친구인 메리 캐스턴 덕분이었는데…… 이삿짐을 여미고 빅토리아를 떠나던 날에도 좋은 글귀가 담긴 책을 선물하며 평온한 모습으로 방문했던 메리의 믿기 힘든 뜻밖의 부고는 나를 절망케 했다. 그러나, 가까웠던 지인들로부터 그녀의 임종 무렵의 모습을 전해 들은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별 증상 없이 가벼운 두통이 잦아져 치료차 병원에 갔다가 폐암 말기와 뇌에 종양이 무려 열한 개나 들어 있어 수술도 항암치료도 없이 호스피스병동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는 예순여섯의 내 친구, 메리는 하늘나라에 가는 소망을 품고 곱고 맑은 모습으로 기쁘게 기도하며 밝고 평온한 모습으로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죽음을 대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각인시켜 메리가 부러웠다고, 여든을 바라보는 어르신의 말씀 덕분에 내게 남기고 간 메리의 좋은 기억들은 시간이 갈수록 어제 일인 양 되살아나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 또한 마련해 주었다.

딱히, 어느 순간부터라고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내가 23층에 살다 보니,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가끔 여러 이웃을 만나곤 하는데, 짧은 그 순간에도 외면해 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불편함 없이 자연스러운 미소와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받았던 나와 아들 녀석은 당황스럽다. 인사를 안 하자니 몸에 밴 익숙한 습관에 어색하고, 인사를 하자니 받는 이의 어색함에 어색해서, 다행히 초고속으로 움직여 주는 엘리베이터의 민첩한 운행 덕에 민망함을 조금 줄일 수 있지만, 그 좁은 공간마저도 불편했다. 게다가 식당 안에서도 언성을 높이며 안하무인처럼 공공질서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어느 젊은 부부의 모습을 본 뒤로는 더더욱 밴쿠버의 삶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배타적인 마음마저 들었다. 하나, 좋은 모습보다는 좋지 않은 면만 부각해 비교하며 밴쿠버에 적응하는 것에 나 스스로 가두고 있었던 건 아닌지…… 어쩌면 색깔이 다른 여러 이별의 슬픔이 잠재되어 새로운 것에 대해 지레 겁부터 먹었던 건 아니었을까? 만일, 내가 밝은 미소를 머금고 즐거움을 마음에 담아, 돌아올 보답의 인사를 바라지 않고 양보운전을 해 나간다면…… 격무가 고되었을 식당의 직원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내가 먼저 건네 본다면…… 문득,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바른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잠언 10: 9)

어색하고 낯 설은 좁은 공간의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반가이 먼저 인사를 하고, 내가 먼저 선한 말과 행동을 한가지씩 해 나가다 보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 고마움과 즐거움으로 저장되지 않을까? 기억 하나하나가 천 만개의 기억이 되어 하나씩 이어 나가다 보면,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 있는 친절과 사랑이 저절로 배여 나와 머잖아 좋은 향을 듬뿍 담은 정말 살기 좋은 밴쿠버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아니, 밴쿠버의 주민이 된 내게서부터 기분 좋은 향이 내 뿜어지지 않을까 소망을 가져 본다.

레스토랑에서 만난 부부의 뒷모습과 나의 소중했던 두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루에도 짧게나마 마주치는 순간의 사람들에게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 무엇을 남기는 사람이 될 것인지…… 늘 한결같은 향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주시는 그분의 향을 담아서

이제부터 나를 가꿔 나가는데 열심을 내야겠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케이팝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한 유명인이 성경 강의를 한다고 해서, 유튜브를 통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강의 시작에 앞서 그 유명인은 자기의 사적인 이야기부터 꺼냈다. 얼마 전 생일날 친구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너에게.”로 시작되는 생일 카드를 받았다고 했다. 그 카드를 준 친구와는 무명 시절을 같이 보냈었는데, 현재 자기는 크게 성공했지만, 그 친구는 여전히 무명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 친구 눈에는 그가 얼마나...
박정은
어떤 눈물 2023.11.20 (월)
   벌써 14년 전이다. 한 방송사가 47주년 특별 기획이라며 보여주던 다큐멘터리는 참 충격적이었다. 우연히 채널을 돌렸다가 보게 된 프로였는데 지금도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지구 온난화로 사냥터를 잃어가는 북극곰의 눈물, 빨리 녹아 사라져버리는 작은 유빙流氷에 갇힌 바다 코끼리, 사라지는 툰드라에서 이동하는 순록 떼의 모습은 결코 아름다운 영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는...
최원현
추수감사절 2023.11.20 (월)
바람에 출렁이는 이삭이하늘 문에 닿아 노크를 하네이제는 두 손 모아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 시간공중에 나는 새도 가만히 내려와바닥에 떨어진 이삭을 쪼네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재단에잔치를 베푸시는 농부의 손은거룩하기만 하고허수아비도 참새도 즐겁게 춤을 추면서풍년을 노래하는 추수감사절부귀영화도 한낱 바람과 같다고 하나오늘 만은 들꽃처럼 환하게 노래 하려네
유우영
금은달 금은별 2023.11.15 (수)
하아. 은별이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우면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 온 집은 말이 좋아서 현대식 한옥이지, 낡은 한옥에 부엌과 화장실만 신식으로 덧지은, 그냥 시골집이었다. 이사를 가지 않으면 밥도 안 먹고 학교도 다니지 않겠다고 강짜를 부리긴 했지만, 이런 깡촌으로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방문 너머로 아빠와 통화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럼, 잘 도착했지. 이삿짐 아저씨들이 다 제자리에 들여놔줘서 정리만...
곽선영
바다/윤동주(사실적) 실어다 뿌리는바람조차 시원타. 솔나무 가지마다 새촘히고개를 돌리어 삐들어지고 밀치고밀치운다 이랑을 넘는 물결은폭포처럼 피어오른다 해변에 아이들이 모인다.찰찰 손을 씻고 구보로. 바다는 자꾸 설워진다.갈매기의 노래에... 돌아다보고 돌아다보고돌아가는 오늘의 바다여!  바다9/정지용(감각적) 바다는 뿔뿔이달어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명희
가을에는 2023.11.15 (수)
단풍잎은 붉디붉고하늘은 깊고 푸르다 아롱다롱 단풍 숲에서뛰노는 아이들 얼굴에물드는 가을빛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니우수수 떨어지는 단풍잎이산길 오솔길에 힘없이 내려앉는다 호들갑스러운 낙엽은바람의 꼬리를 잡고 빙빙 돌고비처럼 내리는 가을은내 가슴팍으로 파고든다 슬픈 그의 얼굴을 손바닥에 올려놓고정답게 비벼본다가을은 어찌 쓸쓸한 계절이던가 우리 모두 때가 되면 떠나야 되느니슬퍼하지 말자아름다운 날...
조순배
가을바람 2023.11.06 (월)
살랑살랑 나뭇가지흔들며 노닐다가 점잖은 하늘아래웃음이 헤퍼선지 한기(寒氣)로옷 벋는 나무 곁을실실대며 지나간다  선비 같은 계절에국화는 제쳐두고 농밀(濃密)한 코스모스짓궂게 희롱(戱弄)하니 더불어놀던 잠자리놀란 눈이 멀뚱하다
문현주
행복해? 2023.11.06 (월)
  내 제자 중에 자폐 스펙트럼 장애(발달장애)가 있는 학생이 있다. 그 학생은 수업이 끝나면 “행복해?”라는 질문을 한다. 아직은 한국말이 서툴러서인지 그렇게 물어본다. 그래서 행복하다 것이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지만 그래도 정확한 뜻을 알기위해 사전을 찾아보았다.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 라고 한다.    “난 가르치기 힘든데 뭐가 행복하다고 묻는 걸까?” 그런데 막상 물으면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청 박혜정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