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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나라로 간다7

김해영 시인 haeyoung55@hotmail.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2-09-28 17:26

지상 천국이 바로 여기에!

-스톤 크립에서 딥 호수까지

패스를 넘고 나서 처음엔 미끄러운 눈밭을 미끄러지듯 달려 내려간다. 하지만 녹슨 톱날과 ‘나무 태우지 마시오.(No Wood Burning)’라는 팻말이 있는 바위 언덕부터선 걸음이 느긋해진다.

안개 목도리를 두른 병풍산과 그 아래 끝없이 펼쳐진 설원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아 풍정에 한껏 젖게 된다. 그러나 풍경화에 한 발 디디면서 풍정은 야구공 맞은 유리창처럼 와르르 깨지고 만다.

눈산 허리춤에 난 발자국이 박음질한 것 같아 보기에는 참 좋더니 막상 설사면에 올라서니 어질어질하다. 30 도 가량의 경사에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비탈길을 간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저 바닥까지 죽 미끄러질 것이고 예까지 올라 오려면 두어 시간은 족히 걸릴 터. 춘향이 신방에 들듯 사뿐사뿐,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조심. 낯설고 물 선 타국에서 엉거주춤 살아가는 새내기 이민자마냥.



스톤 크립이라기에 요람처럼 안락하고 포근할 줄 알았더니.. . 속았다는 풋생각에 곧 따라오는 철든 생각. 하기야 돌요람이 얼마나 아늑하고 편안하겠어. 요람이라기보다는 ‘설원의 그네(The Swing of Snowfield)’라는 편이 낫다. 사람이 늘 그렇다. 남의 글과 말 속 의도는 헤아리지도 않은 채 제 듣고픈 대로 듣고 제 믿고픈 대로 믿는다. 그리고 속았다 한탄을 한다. 오만과 편견으로 남의 글과 말을 제멋대로 해석한 어리석음을 탓해야 하련만.

볕바라기부분은 벌써 눈이 녹아 퍼석거린다.잘 녹아 숟가락으로 퍼먹기 마춤한 팥빙수처럼. 아하, 바로 이 때문이구나! 정오 전에 패스를 넘으라는 게. 만약 빙긋 웃는 아침해를 한참 동무하며 걷는다면 여기쯤은 철퍼덕철퍼덕 진창길이 되어걷기 무척 사나웠을 게다.



안개가 슬슬 걷히면서 하늘이 얼금덜금 열린다. 구름을 비집고 어스름 빛이 들고 푸른 하늘조각이 내비친다. 구름너울을 쓰고 있던 산들이 베일을 벗고 허리 굽혀 경배를 드리면 암청색의 바다가 서서히 어둠을 걷어내고 푸르른 호수가 된다. 그러다가 조각구름 뒤에 숨어있던 햇살이 어깨 너머로 눈부신 살촉 하나 쏘아올린다. 만 년의 잠에 빠져있던 빙붕이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오르는 스타처럼 호수 위로 솟아오른다. 


지상에 천국이 있다면 바로 여기이리라. 문득 천국의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채 말을 잊는다. 바람도 시간도 흐름을 멈춘다. 멀리 태양의 후광을 두른 산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억만 년의 시린 한 품은 빙붕을 어미처럼 안고 다독이는 크레이터 호수(Crater Lake), 그 안에 동동 떠있는 녹색 이끼옷 걸친 바위들. 눈 멀고 귀먹은 시객 하나 서서 솔솔 풀리는 천지 조화를 엿보고 있다.



안개 그리 끼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경치 한 조각씩 엿보는 감흥이 덜했으리라. 그리도 힘든 지옥의 계단을 거치지 않았다면 결코 이 법열에도 이르지 못했으리. 고난은 희열을 위해 예비되고 지옥의 계단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온 천지에 암흑이 걷히고 바다처럼 가없던 호수가 그 경계를 드러낸다. 호수에 칼날처럼 박혀있는 얼음날, 뭉근하게 호수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얼음바위, 널찍한 암반 같은 얼음판 등 각양각색의 빙붕들이 호숫물에 서늘한 그림자를 비춘다. 그 푸르스름한 그림자를 품은 호수가 멍 퍼렇게 든 가슴 안고 살아가는 이 세상 어미 같아 콧날이 매워진다. 수억 만 년 동안 빙하의 눈물방울들을 모아 가슴에 삭여 흘려 보내 아래녘을 촉촉히 적셔 곰과 사슴을 키우고 나무와 들꽃을 피우게 하니, 그대 분명 창조주 어미일세. 가슴애피 앓는 호수를 담으려 사진기를 대보지만 속 좁은 기계는 헛되게 물상만 찍어댄다. 지상천국에 든 감격과 감동을 고스란히 머리와 가슴에 각인시킨 채 돌아 돌아보며 호수 곁을 떠난다.



섬처럼 물속에 잠겨있던 바위가 치솟은 듯한 바위 동산과 드문드문 있는 눈패치 구간을 번갈아 건너간다. 고도가 툭 떨어져 산 고랑에서 흘러 내리는 도랑물 질펀한 자갈밭을 지나 바다거북이 잔등 같은 길고 큰 언덕을 넘자 따끈한 햇볕 아래 썬탠 중인 캠프 패드가 서넛 나온다. 어, 희디흰 눈밭 건너오느라 설맹증에 걸렸나? 백설 문득 사라지고 녹색 가득한 풍경도 이상하고, 10시간~12시간 걸린다는 해피 캠프(Happy Campsite,33km 지점.)에 7시간만에 도착한 것도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고대 나타나는, 휴지 없는 아웃하우스와 벽난로 없는 쉘터가 캐나다 쪽 첫 캠프사이트, 해피 캠프임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따뜻하게 볕이 들고 바람이 자는 텐트 자리를 찾아 헤매는데 어디에도 스윗 홈자리는 없다. 가장 서쪽 끝 패드가 아늑한 듯싶어 자리를 잡았으나 바로 위에 큰 눈패치가 있어  서리바람이 친다. 위쪽 캠프패드는 눈에 무너져 아예 제 구실을 못한다. 뒤이어 하이커들이 속속 들어와 해피 캠프는 활기를 띤다. 30여 분 뒤에 도착한 팀원과 함께 끓여먹은 라면맛은 최고의 별미. 새벽 4시 45분에 쉽 캠프를 떠나 지옥의 계단을 거친 후 천국의 문에 들어와 먹는 별식이니 얼마나 달짝지근했겠는가.



“해도 길고 다들 기력도 펄펄한데 좀더 갈까요? 다음 캠프장까지는 4km, 그냥 물길 따라 가는 길이라 노닥거리고 가면 되는데… .” 내일 노정을 줄이려는 욕심에서 한 깨알 거짓말에 전원 찬성. 눈 잠깐 붙였다가 길을 나선다. 호숫가에서 시작한 트레일이 높은 눈둔덕을 거쳐 자꾸 하늘로 치솟아가는 것을 보고 한 팀원이 묻는다. “우리 길 잘못 든 거 아녜요? 왜 길이 올라가죠?” “이 트레일 맞습니다.”간단히 대답하고 그를 스쳐 지나간다. 난 알고 있었다. 13km 하이킹 후에 덧붙여진 4km는 백 리만큼 멀게 느껴진다는 걸. 또 다음 캠프 사이트까지는 250m 높이의 쌍봉 낙타 무등을 타야 한다는 걸. 긴 호수(Long Lake)를 끼고 딥 호수까지 가는 4km 노정이 참 징하게도 멀다.

가끔, 아니 자주 리더는 거짓말을 한다.’팀원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하얀 거짓말을 한다. 산행 리더는 어떤 명분으로도 씻지 못하는 거짓의 죄악을 날마다 짓고, 시인은 잎새를 울리는 실바람에도 가슴 졸인다.



*스톤 크립(The Stone Crib) 27.4km지점, 거의 일년 내 눈에 덮여있는 산 능선지대. 캐년 시티부터 패스를 넘어 크리에이터 호수 상공까지 케이블을 연결해 물건을 수송했음. 

사진 제공- 김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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