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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허리 바늘 허리 - 차분한 전진 -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09-11-01 00:00

서울 가서 길을 걸을 때 내게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부근 관악구청
이 어디 있지요? 가리봉동으로 가려면 몇번 버스를 타야 하나요?
관악구니, 구로구니 하는 서울의 행정구역이 생기기도 전에 서울을 떠난 신세에 이런 질문을 받으니 실로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가고 있는데 왜 하필 나한테 와서 길을 물을까? 심지어 일본 가서 좀 머물고 있을 때 동경대학이 있는 혼고 산쪼메(本鄕三丁目) 지하철역에서도 어느 중년 여자 둘이서 내게 어디 가는 전차를 어디서 타야 하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내게 길을 물어보는 것을 보면서 필경 내 인상이 그리 험악하지 않은 탓이겠지? 하며 혼자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그런 까닭이었을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고 발견한 것은 사람들이 내게 길을 물어오는 것이 내 인
상이 곱상스러우냐 혹은 험악하냐 하는 것보다는 필경 내 걸음걸이와 관계되리라고 하는 사실이었다. 서울에서는 모두 걸음걸이가 얼마나 빠른지 내 걸음걸이는 느림보에 속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나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때 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걷는다기 보다 뛴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판이다.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보조를 맞춰 따라갈 수가 없다.
모두들 이렇게 급하게 뛰다시피 하는데, 자기가 길을 모른다고 어디다 함부로 말
을 붙이겠는가? 그러니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별로 바쁘지 않을 것 같은 친구에게 물어보는 것이 성공의 필수요건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물어보기 마련 아니겠는가? 그 사람들이 성공의 필수요건인 덜 바쁘게 걷는 사람을 골라잡은 데는 일차적으로 성공했지만, 나처럼 길을 전혀 모르는 숙맥(菽麥)을 만나게 된 것은 결국 실패의 원인이었다. 그 모든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린다.
어디서 나온 통계인지는 몰라도, 누가 그러는데, 뉴욕 중심가에서 걷고 있는 사
람들의 평균 발걸음 수가 1분 동안 44-46보이고, 동경에서는 그것이 54보인가 하는데, 서울에서는 그것이 무려 76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猛烈 speed’ 다.
한국에서 제일 많이 쓰는 말 중에 하나가 ‘빨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만히 관찰해보니 일리 있는 말 같다. 또 한국말 중에 빨리의 동의어가 그렇게 발달된 것이 이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예를들면, 어서, 싸게, 빨랑, 휙딱, 퍼떡, 얼른, 속히, 급히 등등. 그것도 보통은 이 말들을 두번 연거푸 쓴다. 그래서 ‘빨리빨리’ ‘어서어서’ 등이다.
이렇게 ‘빨리’를 강조하니까, 자연히 중국 사람들의 ‘만만더(한문?)’가 두드러지게 보이고, 그래서 중국 사람들을 느린 사람들로 보게 된 것이 아닐까? 한국에서 화교로 중국 식당을 하던 중국 사람이 미국에 와서 식당을 하는데 한국 손님들이 들어와 음식을 주문해 놓고 빨리빨리 하고 재촉하니까, “우리 사람 빨리빨리 소리 듣기 싫어 한국 떠났다해.”하면서, 여기 와서까지 그런 소리 듣기 싫으니 그런 소리 하려면 나가라고 소리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 확인은 할 수 없지만, 족히 있을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줄서기를 못하고 새치기를 잘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근
본적으로 이렇게 급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빨리를 강조하는 현상이 요즘 와서 새로 생긴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
길래 “급하기는 우물에 가 숭늉 달라겠다”는 등의 속담이 예로부터 내려 온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제 조국은 선진조국의 창조를 위해 불철주야 힘쓰고 있는 형편이라서 이
렇게 빨리빨리 신드럼이 더 가속화된 느낌이다. 한국의 일 년은 외국의 십 년 이란 말을 유행시키면서까지 힘껏 뛰고 있다.
그래서 과로로 인한 40대 50대의 사망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야말로 급히 먹는 밥에 체한다고 가끔씩은 느긋한 자세를 취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 메어 못 쓴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
고, 우선은 좀 미련한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실을 바늘허리에 메는 대신 차근
히 바늘구멍에 꼽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정신없이 뛰지만 말고, 가끔씩은 왜 뛰는가? 어느 방향으로 뛰는가?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보는 여유와 함께. 이런 것이 ‘느림의 미학’이라는 것일까?


오교수의 속담풀이
오교수의 속담풀이.
  칼럼니스트:오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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