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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와 도승지 - 매임과 놓임의 역학 -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09-11-01 00:00

“거지가 도승지 불쌍타”고 한다. ‘도승지(都承旨)’란 조선 시대 승정원의 승지들 중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정삼품 벼슬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 비슷한 자리일까? 아무튼 이렇게 높은 자리에서 그야말로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있는 분을 일개 거지가 감히 동정을 하다니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냐. 자기 앞도 못 가리는 사람 제 할 일이나 똑똑히 하라는 뜻의 속담이다.
거지 아버지가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어떤 부잣집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 식구들이 모두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거지 아버지가 자기 아이들을 향해 왈, “너희들은 저럴 걱정이 없으니 그것이 다 아버지 잘 둔 덕인 줄이나 알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스개 소리에 불과하겠지만, 살아가면서 점점 이 소리가 단순한 우스개 소리만일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요즘 같은 사회에서 그 무슨 어정쩡하고 맹랑한 소리를 하는가? 자본주의 최대의 미덕은 부를 축적하는 일.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좋다. ‘To be or not to be’가 문제되던 시대는 지나가고 ‘To have or not to have’가 문제되는 요즘. 인간은 그 됨됨이(being)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짐(having)으로 저울질 되지 않는가. 유대인을 보라 우리도 샤일록처럼 고리대금업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한 번 ‘큰 손’으로 군림해 봐야 하는 것.
이런 판국에 어디 거지 신세를 찬양하려 하는가. 그런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자세로 남을 오염시키려 들지 말라”고 하는 꾸중 소리가 귀에 쟁쟁 들리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 거지됨 자체를 찬양하거나 부자 됨 자체를 불쌍히 여기자는 것이 아니다. ‘돈이 있다 없다’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바울의 말처럼 돈 자체가 아니라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 거기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 집착이 문제라는 것이다.
돈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어서 가난해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돈돈하고, 이렇게 돈돈 하느라 더 가난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돈에 달라붙어서 악바리처럼 움켜잡음으로 부자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일단 돈을 가져 봐도 별로 신통할 것이 없음을 알고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린 부자들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은행 구좌에 얼마 이하의 돈이 있는 사람은 천국행, 얼마 이상의 돈이 있는 사람은 지옥행 하는 식으로 외부적으로 나타난 부의 척도에 따라 양과 염소를 가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원숭이 잡는 틀 생각이 난다. 남양이나 아프리카에서는 코코넛에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 속에다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땅콩이나 과자를 넣어 가지고 그것을 나무에다 묶어 놓는다.
원숭이가 냄새를 맡고 접근한다. 코코넛 속에 있는 땅콩을 꺼내겠다고 손을 쑤셔 넣어 땅콩을 한 줌 쥔다. 일단 주먹을 쥔 손은 그 구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땅콩이 아까워서, 일단 잡은 것을 놓았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아서, 혹은 그렇게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이 자기를 얽매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라서, 손을 펴지 못하고 그대로 거기 붙들려 있게 된다. 그러면 원숭이 사냥꾼은 유유히 다가가서 그 원숭이를 사로잡는다.
거지든 도승지든 손을 움켜쥐고 펼줄 모르면 불쌍한 사람이다. 거지든 도승지든 손을 펼 때 펼 줄 알면 자유스러운 사람이다. 거지든 도승지든 더욱‘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딤전6:9) 결국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게 된다(마19:24).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마6:26, 28)고 하는 예수님의 권고는 오늘 같은 세상에서 한낱 잠꼬대에 불과한가? 오늘 같은 세상이니까 더욱 절실한 초청의 말씀이 아닐까.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


오교수의 속담풀이
오교수의 속담풀이.
  칼럼니스트:오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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