亡者에 대한 예의

故 정몽헌 현대회장의 투신 자살소식은 충격이었다. ‘밴쿠버 선’을 비롯한 현지 캐나다 신문들이 앞 다투어 이를 상세히 보도했고 밴쿠버 한인들의 반응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재벌 총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길래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라는 혼란스러운 의문들이 한동안 머리를 어지럽히더니 몇 해전 우연히 목격한 정회장의 그때 그 표정이 자살직전 남긴 유서 위에 오버랩 됐다.

2000년 10월 어느 날 저녁, 웨스트 밴쿠버의 한 일식집에서 만난 정회장은 이름만 들으면 금방 알 수 있을 S씨와 동행했다. 식사도중 그는 간간히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입가에 머금을 뿐 좀처럼 말이 없었고 주문은 옆에 있던 동행이 유창한 영어로 했다. ‘촌색시’라는 별명처럼 내성적인 성격의 정회장은 묵묵히 술잔만 들이켰고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당시는 현대그룹이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기업 후계자 문제로 인해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뒤 그룹경영 자체가 위기에 처했던 시점으로 국내에서는 정회장의 귀국을 재촉하고 있었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와중에 태평양을 사이에 둔 한적한 이곳에서 S씨와 함께 할 정도로 여유(?)를 보였던 정회장도 실은 사업과 가정을 둘러싼 인간적 고뇌가 무거웠을 듯 싶다.

그로부터 2년 10개월 만에 그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정회장이 자살 직전 남긴 유언을 놓고 어떤 이는 ‘구차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당당하게 모든 걸 떠안고 가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며 자살의 동기는 엘리트의 자존심 손상에 있다’며 싸늘하게 분석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살에는 배후가 있다’며 정치적 음모론 마저 제기했다.

비록 그가 ‘실패한 경영자’라 하더라도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엘리트적 발상 운운하는 것은 망자(亡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물려 받은 선친의 유업을 이루지 못한 채 비좁은 계동 사옥의 창문을 넘는 순간, 그가 가졌을 법한 마지막 마음. 남겨진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유분은 금강산에 뿌려달라’는 그의 소원이 남긴 안타까움을 먼저 느끼는 것이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이용욱 기자 lee@v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