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과 현실 사이서 짓눌린 어느 고교생의 하루
말로만 자율학습 거부땐 야단 맞아
10시 넘어 학원行… 잠자리는 빨라야 새벽 1시30분쯤…
인천광역시 A고등학교 2학년인 B양은 요즘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학교에서 거의 강제로 방과 후 '자율학습'을 해야 하고, 자율학습이 끝나면 밤늦게 학원에 가기 때문이다.

학교에선 사교육을 줄이라고 저녁에 B양을 붙들고 있지만, 내년 입시를 앞두고 학원 수업을 포기할 수 없는 게 B양의 처지인 것이다. B양의 부모도 교육당국·학교의 방침과 현실의 모순 때문에 딸의 학습효과가 떨어지고 고생만 심해지는 것을 억울해하고 있다.
▲ 사교육을 줄이겠다는 교육 당국의 정책과 입시를 앞두고 학원 수업을 포기할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학생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인천의 한 고등학교 2학년인 B양이 9일 새벽 0시 20분쯤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고 있다. /탁상훈 기자 if@chosun.com


B양은 정규 수업이 끝나는 오후 5시 이후엔 학습능력 수준에 맞는 학원을 찾아 공부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이 이걸 허용하지 않는다. 아침 8시 20분 등교 이후 7~8개의 수업을 들으면 오후 5시에 정규 수업이 끝난다. 이후 오후 6시까지 거의 의무적으로 방과 후 수업을 듣고, 저녁 식사 후 오후 6시 50분부터 학교에 남아 야간 자습을 해야 한다. B양은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거나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려고 하지만, 친구들이 떠들어 공부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B양은 야간자습이 끝나는 밤 9시 30분쯤 가방을 챙겨 학원에 간다. 학원에 도착하는 시간은 밤 9시 50분 무렵. 외부 강의는 밤 10시부터 시작하는 것밖에 들을 수 없다. 영어·수학 두 과목의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새벽 0시 20~30분. 결국 B양이 학교 숙제와 EBS 인터넷 강의 시청을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각은 새벽 1시 30분 이후다. B양은 "학원이 만능은 아니겠지만  수험생들과 대입에서 경쟁하려면 최소한의 이용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며 "수면부족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내 시간을 내 성적이나 성향에 맞게 활용할 수 없는 것이 제일 속상하다"고 말했다. B양은 이달 초 담임선생님에게 "야간 자율학습에서 빠지고 싶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런 말을 했던 같은 반 친구가 선생님에게 야단을 듣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
인천지역에선 A학교 외에 인근 C고·D고 학부모들도 "야간 자율학습을 '말 그대로 자율로 해달라'"고 반발하는 민원이 인천시교육청에 밀려들고 있다. 경기도의 상당수 학교도 학생들에게 야간 자율학습을 강요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시교육청 교육지원과 관계자는 "야간 자습 참가율이 교장 평가와는 관계가 없다"면서도 "다만 일부 교장들이 야간 자습을 시키는 것이 학교 위상과 평균 성적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학원 심야 단속이 없는 인천과 달리 서울에선 밤 10시 이후 학원 문을 닫게 하고 있다. 하지만 교과부의 이런 정책은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일부 학원들은 밤 10시가 되면 셔터를 내린 채 강의를 계속하고, 일부 학생들은 학원이 끝나면 다른 장소로 옮겨 다시 과외수업을 듣는다.